티스토리 뷰

 

 

위성연+황복선(이뢰아)

 

약간 긴 소설.

11465자.

 

 

 

 

Anniversary Effect (애니버서리 이펙트)
통칭 "기념일 증후군"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일종으로 재해, 사고, 사건 등을 조우한 사람이 해당 일을 겪었던 날짜가 되면 겪는 부정적인 신체 반응이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에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이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 날 겪었던 사고를 떠올리고 불안증이나 불면증, 우울감에 빠지는 현상을 말한다.

 

 

 

 

더보기

 

 




언제부터 신경 쓰기 시작했던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우리들이 그 부두에서 한바탕 큰 싸움을 치른 이후부터일 것이다. 시작은 어찌 되었든 결론적으로 힘을 합쳐 싸웠고, 공통의 적을 물리친 지금 최초의 감정을 이제와서 긁을 일도 없는 것이다.


가장 처음으로 생각했던 것은, 그 녀석의 쌍둥이 동생에 대한 일이다. 처음엔 그 놈이 맞는 줄 알고 그 녀석에게 그 놈을 데려다 줬으나, 그 녀석의 쌍둥이 동생인 줄 알았던 녀석은 사실 변장한 가짜였고, 진짜는 창고 안에서 이미 사망한지 오래였다. 나는 무슨 말을 했어야 할까. 자신의 쌍둥이 동생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깊게 절망했던 그 녀석에게. 동생이 살아있다고 착각하며 기뻐했던 그 녀석의 얼굴에 대고.


두 번째로 생각했던 것은, 싸움이 끝난 후 그 녀석의 일상. 굳이 이 학교에 전학 온 것은 나나 황지를 감시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이제와서 그런 목적은 다 부질없는 일. 진짜 이름을 숨기고 이 학교에 와서, 그 녀석은 달리 친구를 사귀지도 않고 제멋대로 굴어왔다. 딱히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도 않는, 딱 그 정도의 경계선을 긋고. 쌍둥이 동생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진 학교 안에서 그 녀석이 있을 장소는 없었다. 


급식실에서 덩그러니 혼자 서서 머뭇거리는 그 녀석에게 나는 신호를 보냈다. 많이 당황한 눈치였지만 그래도 거절은 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땐 내쪽에서 거절했지만. 그 날 그 때...우리들이 이렇게 마주앉아 급식을 같이 먹을 날이 올 것이라곤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됐다. 얄궂게도.


그 날 이후 나는 그 녀석과 평범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왔다고 생각한다. 같이 밥 먹고, 쉬는 시간엔 잡담도 하고. 첫째로는 죄책감에, 그 다음으로는 동정심에,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약간의 동료애를 느끼며. 녀석의 동생을 죽인 것은 내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괜한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가, 희망고문이라도 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좀 되었다. 원래 없던 것, 가지고 있었으나 사라진 것. 이 둘의 차이는 아주 큰 것이다. 그렇다, 마치 내겐 원래 가족이 없었으니 가족이라는 것에 기대가 없었던 과거가 있는 것처럼. 완전히 맞아 떨어지는 비유가 될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죽었다고 받아들였더라면. 사실은 살아있었다는 희망을 품지 않았더라면. 그러다가, 결국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받아들일 바에는.


생각보다 그 녀석은 괜찮아보였다. 부두에서 보여줬던 그 절망에 찬 얼굴을 다시 보이는 일은 없었으니까. 힘든 일을 겪고 간신히 살아났으니 정신적으로 약간 지쳐서, 혹은 마모되어서 슬픔을 느낄 틈도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만서도. 정말로 생각보다, 그 녀석은 담담히 학교에 나왔고 웃고 떠들었다. 어쩌면 나는 그 녀석의 그런 모습을 보고 그 녀석이 완벽하게 괜찮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야, 그 녀석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존재가 항상 유령처럼 우리들 곁을 떠다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나는 그 녀석에게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


그 녀석이 학교를 쉬었다. 원래부터도 가끔씩 빠지던 녀석이니까, 처음엔 그러려니 했다. 하루를 꼬박 쉬고 다음 날엔 제대로 학교에 나왔기에 별다른 의문도 가지지 않았다. 넌지시 왜 전날 학교를 쉬었는지 물어보면 약간 부루퉁한 표정을 지으며 몸이 안좋아서 그랬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쌍둥이 동생을 대신 부두에 보냈던 것도 감기몸살 때문이라고 그랬던가. 똑같은 행성인간이라지만 아무래도 문명에 차이가 좀 있는 모양이었다. 미은 누나라면 감기에 걸릴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 동생에 대한 화제로 가지 않도록 나는 조심스럽게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다행히 그 쪽 이야기로 튀는 일 없이 무난한 대화가 이어지고 곧 수업종이 울렸기에 크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 뒤로도 하교시간이 될 때까지 녀석은 평범하게 웃고, 떠들고, 졸고, 밥을 왕창 먹었다. 그래서 그냥 평범한 일상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녀석이 또 학교를 쉬었다. 원래도 자주 빠졌던 녀석인데 출석일 수에 문제는 없는지 살짝 걱정이 됐다. 저번 결석에서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감기몸살에라도 걸렸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다. 만약 며칠 간격을 두지도 않고 정말 또 다시 감기몸살이라면 녀석의 신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될 수준이다. 행성인간은 보통 인간보다 훨씬 튼튼하다. 암세포마저 자원으로 삼아 무한한 발전을 이루는 몸안의 주민들이 몸속에 침입한 바이러스나 세균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녀석은 "자원"을 얼마나 많이 섭취해왔을까. 어쩌면 정말로 자원 고갈때문에 몸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진지하게 걱정되었지만, 아직 그 녀석과 나의 관계가 그런 부분까지 터놓고 이야기할 정도로 좋아졌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적대하는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사에 직결되는 민감한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관계인지는. 그렇게 하루종일 그 녀석을 걱정하며 보냈지만 왠지 집에 찾아가서 물어보는 것도 약간 미묘한 느낌이었기에 그저 녀석이 다음 날 학교에 무사히 나오기만을 바랐다. 다행히도, 녀석은 다음 날 등교해왔다. 무슨 일로 또 학교를 쉬었냐는 물음에 그 녀석은 태연한 얼굴로 "그냥 학교에 갈 마음이 안 들어서"라고 대답했다. 전날 그토록 걱정했던 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시원스러운 대답이었다. 너무 자주 결석하면 너 유급할지도 몰라. 그런 말에 그 녀석은 코웃음을 쳤다. 유급할 만큼 안 나오진 않았거든! 그렇게 또 다시 평범한 일상이 흘러갔기에 나는 의문도 걱정도 다시 떨쳐내고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요 3개월 동안 녀석은 정말 예고도 없이, 갑자기 학교를 쉬곤 했다. 그 전날엔 평범하게 대화하고 헤어졌는데, 갑자기 학교에 오지 않아 어찌 된 일인지 휴대폰으로 메세지를 보내보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오늘은 그냥 쉴래"라거나, "늦잠 잤으니까 그냥 안 가려고"라는 등, 실로 제멋대로 구는 태도의 답장이 오곤 했다. 녀석이 학교에 오지 않는다면 그건 그 녀석의 자유이므로 이쪽에서 잔소리를 할 이유도 없긴 했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정말로, 유급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래도 되는 걸까. 하루 쉬고나면 다음 날 멀쩡한 얼굴로 등교해오니 무슨 큰일이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닌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마음 안쪽에서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괜찮은 거냐. 너.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우리들의 거리감은 어느 정도일까? 처음엔 서로를 배제하는 관계였다. 생과 사를 걸고 적대하는 관계였다. 그러다 모든 것이 흐지부지되어, 녀석은 유일한 혈육인 동생을 잃고 애매하지만 이쪽에 우호적인 관계로 돌아서게 되었다. 부두에서 있었던 그 싸움에서, 분명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서로에게 등을 맡기고 싸웠다. 하지만, 그런 걸로 모든 응어리가 풀어질 수 있는 걸까. 하물며, 자의는 아니지만 동생에 대한 희망고문을 저지르고 말았던 나에 대해 녀석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 걸까. 그 모든 복잡한 감정이 꾸깃꾸깃 내 머릿속에 흘러들어와, 도무지 깔끔하게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녀석이 학교를 멋대로 쉬더라도, 그 다음날엔 학교에 멀쩡히 오는 것을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무슨 큰일은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계속 말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는 하루를 쉬어도 다음 날엔 꼭 학교에 왔던 녀석이, 처음으로 이틀 연속으로 학교를 쉬었다. 그 전날엔 "왠지 몸이 나른하니까 학교에 가지 않겠다"라는 메세지를 보내왔었다. 그럼, 오늘은? 왜 오늘도 안 나왔냐는 메세지에, 수업이 거의 끝나기 직전이 되어서야 답장이 날아왔다. "그냥"이라고. 학교를 그냥 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말그대로, "그냥" 쉬는 것일까? 그저 하루 변덕이 더 들어서 이틀 연속으로 쉬었을 뿐인 걸까? 내일이 되면, 녀석은 다시 멀쩡히 등교하는 것일까? 언제나처럼,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교실에 들어와서 자리에 앉고, 제대로 읽지도 않을 교과서를 펼치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걸까? 역시 걱정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들의 관계는 어중간한 관계. 집까지 찾아가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조심스레 물어볼 형편이 되는 걸까?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로, 그저 녀석이 다음 날 학교에 태연스레 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녀석이 학교를 쉰지 3일째가 되었다.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왜 안와" "너 그러다 진짜 유급한다" "읽었으면 답장 좀 해" 거듭 메세지를 보냈지만 읽었다는 표시만 뜰 뿐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읽고는 있으니 자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인데, 답장은 왜 보내지 않는 걸까. 문득─어떤 나쁜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엔 그 모임의 단톡방 멤버였다. 혹시, 남아있는 멤버가 있었다면? 모임이 파탄난 것에 원한을 품고 그 멤버가 녀석을 찾아갔다면? 혹시라도, 감금을 당했다면?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자신이 동물원 지하에 감금당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 종이인간은 죽었지만 다른 멤버들이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침 조회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러냐는 황지의 말에 "나 조퇴한다고 전해줘"라고 짧게 말한 뒤 바로 학교를 나섰다. 장마철이라 바깥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을 쓰고 걸어가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한손에 우산을 꼭 쥔 채로 비를 맞아가며 급하게 아파트까지 달려갔다. 심장이 난폭하게 고동쳤다.


아파트로 향하는 도중에 몇 번이나 녀석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신호가 길게 울리다가 음성사서함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딱히 통화거부를 누르는 것 같진 않았다. 말그대로, 무시. 중간중간 "전화 받아"라고 메세지를 보내면, 그건 바로 읽음 표시가 달렸으므로 더더욱 나쁜 예감이 들었다. 녀석의 휴대폰은, 화면이 켜진 채로 방치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슨 나쁜 일에 휘말려서...그래서...더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현관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망설임도 없이 문고리에 대고 스파크를 날렸다. 빗물에 젖은 온몸에 전기가 찌르르 퍼졌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오토 도어락이 허용량을 초과하는 전기출력을 뒤집어 쓰고 연기를 내뿜더니 제멋대로 열렸다. 바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신발장엔 녀석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집안에 있는 건가? 그렇다면 집안에 감금당한 건가? 언제든 번개를 내뿜을 수 있도록 몸의 발전소를 돌려가며 조심스럽게 집안을 둘러보았다. 살풍경한 집. 안에는 필요 최소한의 가구와 도구밖에 놓여있지 않았다. 원래 작은 평수인데도, 이렇게나 휑하면 넓어보이기까지 했다. 굳게 닫힌 방문 앞에서 나는 숨죽이며 바로 번개를 쏠 태세를 갖춘 뒤 문고리를 붙잡고 천천히 돌렸다.


...그 방안에 녀석은 있었다.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창문에 커텐을 굳게 쳐놓고, 방의 불도 켜지 않은 채로. 녀석의 표정은 공허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내가 방안에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느낌이었다. 시선은 방의 한구석을 향하고 있어, 이쪽을 전혀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휴대폰은 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화면은 켜진 상태였고, 그 화면엔 나와의 대화창이 열려있었다. 메세지를 보내자마자 읽음 표시가 떴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녀석은, 일단 무사했다. 그래,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상한 곳도 없고, 감금당한 것도 아니고, 무슨, 행성인간 단톡방의 남은 멤버가 녀석을 찾아온 것도 아니고, 아무튼, 무사했다. 하지만,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거야.

"...괜찮아?"

조심스럽게 녀석에게 다가가려다가, 문득 비에 잔뜩 젖은 자신의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왠지 무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바닥에 빗물이 고여간다.

"...미안."

대답하지 않는 녀석에게 일방적으로 사과한 후 나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비에 젖은 교복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적당히 옷을 털어낸 후 나는 재차 녀석에게 다가갔다. 계속 말을 걸어도 반응하지 않던 녀석이, 내가 시야에 들어오자 고개를 살짝 들고 입을 열었다.

"...지선이?"

그 말에 나는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아니야, 그건...네 동생 이름이잖아...그 때 부두에서 죽었던......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는데, 녀석이 다시 말했다.

"...아, 너였구나. 미안..."

바로 날아온 정정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어째서, 나를 보고 그 놈의 이름을 올렸는가. 닮은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을 터였다. 키도 내쪽이 한참 크고, 머리색도 다르고, 얼굴 생김새도 완전히 다르고, 그 놈은 안경도 썼다. 깜빡 잘못 볼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놈은 죽지 않았던가. 폭우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방안에 울려퍼졌다. 머릿속에 경고의 사이렌이 울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물어보아야만 했다. 어째서, 왜.

"...왜 걔 이름을?"

이 상황에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이었다. 어째서, 나를 보고 그 놈의 이름을 입에 올렸는지.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이었다...녀석은 표정을 흐리며 말했다.

"...예전에, 지선이인 척하면서 나한테 다가왔던 거 너였지?"
"......어, 언제?"
"지선이가, 학교 옥상에 황지 불러서 일진 애들이랑 같이 두들겨 팼던 날 있잖아."
"...아, 아...응."

처음엔 찔끔해서 무심코 되묻고 말았지만 수긍하였다. 

"나...그 땐 네가 정말 지선이라고 생각했어. 왜 그랬는진 모르겠지만...정말로. 지선이가 너로 변해서 나한테 말을 걸어온 거라고 생각했거든. 나는 바보같이...그걸 다 믿고 너한테 있는 말 없는 말 다 해버렸잖아? 마지막까지 긴가민가했지만...그래도 지선이일 거라고 믿었거든. 근데...다시 생각해보니까 역시 너였던 것 같아서."
"...음, 맞아. 나였어......"

이제와서 그 날의 일을 갑자기 왜 꺼내는 걸까.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내게, 녀석이 이어서 말했다.

"...나, 정말 그 때 네 모습을 보고 지선이라 생각했었어...그래서......방금 널 봤는데, 갑자기 지선이가 떠오르더라. 지선이가 네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게 아닐까 생각했어. 그 때도...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바보같지?"
"......"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무엇을 대답할 수 있을까. 

"......나......아무래도 이런 날엔 자꾸 지선이가 생각나. 그 날...내가 감기몸살에 걸리지만 않았어도...지선이를 대신 보낼 일은 없었을 거니까...나만 그 자리에 갔더라면 지선이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지선이가 죽은 건 어쩌면 나 때문이 아닐까 계속 자책했어. 분명...논리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 나쁜 건 그 새끼지...가증스럽고 뻔뻔한 그 새끼...그리고 그 징그러운 돌고래...걔네들이 나쁘다는 걸 알아.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서 자꾸 나를 탓하게 돼. 역시, 나 때문이 아닐까 하고."

녀석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말 없이 그저 듣고 있었다. 그런 나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했는진 몰라도, 녀석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래서...그래서...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서...지선이가 생각나서......나 때문에...나 대신에...이렇게...비도 내리는데...부두에 가서......"

거기까지 말하고 녀석은 고개를 자기무릎에 파묻었다. 거기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녀석이 학교를 쉰 날은 언제나 "비가 오는 날"이었다는 것을. 하늘색은 우중충하고 교실의 창문 바깥으로부터 후두둑 후두둑 빗소리가 들려오는 그런 날이었다는 것을. 그 날, 부두에서의 싸움. 그 날은 많은 비가 왔었다. 그 전날에도, 그 전전날에도.


황복선이 감기몸살때문에 황지선을 대신 부두에 보냈던 날. 황복선이 황지선을 잃은 날.

비가 내리던 그 날.


녀석은 비가 내리는 날이면 자연스레 쌍둥이 동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 날, 감기몸살 탓에 동생을 대신 보내는 바람에 죽음을 맞이하게 만들었던 본인을 탓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말했듯 분명 직접적으로 동생을 죽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 그러하니까. 냉정하게도 현실이 그랬다. 녀석은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녀석은 비가 내리는 날이면 동생을 떠올리고 극심한 스트레스와 우울감에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놓고도 비가 그친 다음 날이면 어떻게든 학교에 왔던 것이 장하게 느껴질 정도로.

"...윽......"

문득 녀석을 살펴보자 얼굴을 무릎에 묻고 있어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몸을 가늘게 떨며 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건네주어야 할까? 네 탓이 아니라는 진부한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상황에 100% 알맞는 정답이 존재하긴 할까. 아니, 1%라도 맞는 정답이 있을까. 애초에 우리들의 관계에서, 무슨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녀석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 그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우리들의 관계에서는 정답을 찾을 수 없으니까. 정답을 찾을 수 없다면, 그냥 마음 가는대로 해버리자. 애초에 정답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무슨 오답을 내든, 어차피 전부 오답이다. 하지만 기왕이면, 조금이라도, 1%라도 정답에 가까운 오답을 찾자. 그것이 내 대답이 된다.

젖은 몸이었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녀석의 옆에 앉아 살짝 녀석을 감싸안았다. 이불 너머로 껴안아서 젖은 몸이 녀석의 피부에 닿지 않도록. 녀석은 깜짝 놀란 것 같았다. 파묻었던 얼굴을 들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이 벌써 빨갛게 부어 올라 울먹이는 눈동자 너머로 당혹감이 비쳐보였다. 그야, 놀랄 만도 할 것이다. 나도 이런 짓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솔직히 믿기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오답일지라도, 뭐라도 대답을 내놓아야만 했다. 완전히 백지로 남겨두기보단 1%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비 오는 날엔 나한테 연락해. 아니면 우리집에 찾아와도 좋고. 학교엔 와줬으면 하지만...힘들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 학교가 뭐 대수야. 유급만 안 하게 조절하면 되잖아. 내가 알기로는 출석일 수의 3분의 1 이상 빠지면 유급이라던데...설마 내내 비가 오진 않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아마 괜찮을 거야. 그냥 학교 빠지지 뭐. 뭣하면 나도 그냥 쉴까 싶어. 비도 오고 기분도 별로인데 학교에서 공부까지 하면 더 우울해질 거 아니야. 그러니까...비가 오면 둘이 그냥 실컷 놀자. 비 오는 날엔 밀가루 음식이라던데, 칼국수같은 것도 먹고. 부침전같은 것도 먹고. 피자도 밀가루로 만들지? 피자 시켜먹어도 되고. 아니면 아예 치킨이나 햄버거를 먹어도 좋고. 아무튼 맛있는 거 다 먹자. 만화카페에 가서 같이 만화도 읽자. 게임같은 거 좋아해? 뭐 하는 게임 있으면 같이 PC방에 가도 좋아. 집에서 노는 게 좋으면 보드게임같은 거라도 하자. 아니면 게임기로 놀아도 좋아. 요즘 나온 게임기는 컨트롤러가 기본 2개라서 둘이서 하기 좋더라. 게임이 싫으면 노래방에라도 가자. 가서 목이 쉴 때까지, 서로 아는 노래가 없어질 때까지 부르자. 뭐든 좋으니까...그러니까..."

목이 메었다. 입술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다.

"......네가...괜찮아질 때까지......뭐든 하자고......"

생각나는대로 횡설수설 읊은 말에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간 나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진짜 바보 아니야!?"

그렇게 외치고는 녀석이 내 품에 안겼다. 아...하는 짧은 목소리가 나왔지만 저지할 틈도 없었다. 비에 젖어 차가운 몸에 녀석의 몸이 닿아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왔다.

"차가워! 이 멍청아! 대체 비는 왜 이렇게 맞고 온 건데?! 침대도 다 젖고 바닥도 다 젖고! 어떻게 할 거냐고!"
"...미안...내가 다 세탁해둘게. 바닥도 닦고..."
"진짜 멍청이야 너! 진짜로!!"



+++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겨우 진정한 녀석이 내게서 떨어졌다. 어느 정도 감정의 정리가 되었을까.

"...고마워."
"......아니야."

약간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나서, 일단 옷이나 갈아입으러 집에 돌아가라는 말에 나는 묵묵히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남아있는 걸 깜빡했다.

"뭐야...이거...현관문 왜 이래? 그러고보니 너...어떻게 여기 들어왔어!? 미친 거 아냐? 너 번개 쐈어?"
"아..........응."
"이 또X이 새X를 봤나! 야 이거 어쩔 건데! 도어락이 완전히 망가졌잖아! 어쩔 거냐고!!"
"미안...수리비는 내가 낼게..."
"아니 대체 도어락을 박살내서 집에 쳐들어올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너 진짜 또X이 아니야?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라 좀!! 초인종이라도 누르라고!!"
"......그게,"
"뭐가 그게야!"
"......네가 걱정 돼서..."
"...??? ??? 하... 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걱정을 왜 해! 연락 좀 안 받는 것 가지고...무슨...참나...아니...하....진짜 미X 새X네 이거..."

녀석은 완전히 평소의 텐션으로 돌아와있었다. 마구 까이는 중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역시 넌 그렇게 위세 좋게 당당한 모습이 잘 어울린다. 방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



다음 날에도 비가 내리긴 했지만 녀석은 학교를 쉬지 않았다. 약간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아직도 복잡한 심정일 것이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던 걸까. 간단히 인사해주자 녀석이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이제 비 와도 학교 안 쉴 거야. 언제까지고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어, 그래...잘 됐네. 유급도 안 하고..."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건 더할 나위 없는 일이다. 죽은 동생을 언제까지나 그리워하며 멈춰서 있는 것보다야.

"...하지만...너네 집엔 갈게."
"...응? 뭐?"
"......네가 오라며!!!!!"
"아,"

순간 멍때린 대답에 녀석이 화를 내며 내 가슴을 주먹으로 때렸다. 무지하게 아프다. 이 녀석의 카피능력은 30분이 한도라고 들었는데, 어디서 미은 누나의 주먹을 복사해왔나 싶었다.

"...어어, 와도 돼. 오늘도..."

비가 오고 있으니까.

녀석은 약간 삐친 듯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고는 돌아섰다. 왠지, 조금은 안심이 된다.

"...오는 거 기다리고 있을게."

그 말에 대답은 없었다.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하지만 분명, 오늘 너는 우리집에 올 것이다.
그러니, 오늘 무엇을 하며 너와 시간을 보낼지 생각해봐야겠다.

조금이라도 네가 비 오는 날에 웃을 수 있도록.

 

 

 

 

 

 

 

 

댓글